초당공(휘 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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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49회 작성일 10-09-15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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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공1.JPG 초당공2.JPG 초당공3.JPG 초당공4.JPG  초당공6.JPG 초당공7.JPG 초당공8.JPG 초당공9.JPG

송월당공5.JPG

(위 지석은 2001도에 토지공사 수용으로 산소를 이장하면서 당시 임원진이 잘못하여 귀중한 유물들을 훼손하여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습니다.)

 

참고사항

지석 원문을 복원하여 올립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번역을 하여 올려 놓았습니다.

 

원문

朝鮮國 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姜公墓誌

判尹姜君以其大父草堂公行狀屬余曰吾先君將刊石表隧不克而歿今吾兄弟欲遂先志願子成之噫余非能言者其何以所昭德焯行傳信來世顧余猥忝秉筆不可以辭謹仍其狀而次之公諱景叙字子文號草堂晉州大姓曾祖諱元佑官之牧使祖諱中善嘗今文化倭寇來犯公擊破之以功陞谷山軍事考諱舜民成均生員 贈戶曹參議妣海平尹氏高麗侍中碩之後判官仁鄕之女也公生正統癸亥中壬辰司馬兩試登丁酉文科選補承文院權知俄薦入藝文館爲檢閱累遷軍器寺主簿司憲府監察充書狀朝京師使還乞便養地監殷栗縣未久徵拜弘文館修撰轉兵曹佐郞弘文敎理吏曹正郞奉常寺僉正司憲府掌令漢城府庶尹司諫院司諫成均館司成司憲執議丁巳登重試授濟用監正移掌樂院正與修

成宗實錄戊午遺史禍謫會寧辛酉放還海州屛居村庄苦將終身丙寅

中廟卽祚召拜司䆃寺正參修燕山實錄丁卯魁 廷試陞拜大司諫選兵曹參知復拜諫長己巳拜承政院左副承旨庚午正月十一日以疾卒于第享年六十八公性剛方寡言笑少許可唯好讀書手不釋卷衣垢屋漏晏如也聞人之過若將浼焉見人之善若已有之嘗讀韓休傳至明皇貌瘦天下파之言掩卷下淚常曰土生一世行己以正立朝以直而己屈志苟進吾不能也平生未嘗袖刺于人而一時知名之士日踵于門輒置酒商確古今時又訓誨學從亹亹不倦成廟得其爲人眷注日深及事中廟公歎曰晩遇聖君冀效微忠丹心未展身已老矣嗟嘆久之病革命左右扶起正坐而逝士林莫不悼惜 上聞其家窮無以庀喪 命有司賜棺槨諸需葬于交河治南所伊山辛坐乙向之原與夫人爲雙隴夫人朴氏判院淳之孫評事叔暢之女生而貞正常覽烈女圖服?拳拳治家有法恩禮俱至閨門之內肅如也公常敬之如賓嘗有一傔袖鷄卵遺公兒子夫人曰主君平生未嘗受人之饋豈以兒故累其淸德耶郞命還之及公遠謫痛其非辜日夜號泣不食遂成沉痼疾旣危槪然曰吾病殆不起更不得奉巾櫛事吾郎君矣爲書告訣遂嘔血而逝年三十六

中廟初政下敎旌門公所箸遺藁頗多放失只有草堂詩

集行于世有一男一女曰公望力學不成以子貴 贈判書女適監察成希文亦以子貴 贈判書判娶書奉事崔長孫女生五男二女曰旻早天曰昱都承旨曰昊忠順衛曰暹卽判尹公曰晟縣令女長適宗室龜山令次適奉事尹商元監察生五男二女曰世憲萬戶曰世章今爲戶曹判書曰世範早天曰世則今爲北道虞候曰世準參奉女長適忠義衛李世芬次適同知中樞府使吳誠承旨有男曰大虎生員女長適弘文館敎理趙廷機次適鄭億齡忠順有女長適安潤國次適李之吉判尹有男曰義虎權知成均館學諭女適察訪柳永成縣令有女長適李光輪次幼龜山有男曰順慶進士曰復慶有慶皆幼女長適宣傳官李孝宗車適許隣弼次適崔仁立奉事有女長適崔光奎次適南一凱萬戶男曰成斗直長女適府使金世功判書有男曰成尹女長適直長閔守道次適尹霙次適縣監韓淳次適宗室龜城正次適生員朴東老虞侯有女適生員洪義弼參奉有女適李應忠義有男曰礩確磑女長適韓諶次適縣監金鍧次適金侃同知有男曰應麒女長適直長趙昕次適生員曺大直次適全景福內外高孫男女在幼者八十餘

銘曰

姜曁朴   一與齊   性之剛   德不孤   謫非辜

世大族   兩美合   行也烈   食何薄   痛罔極



死靡回   久則徵   裕後昆   熾而昌   保無窮

老己及   天可必   濬長發   賢且達   視此石



皇明萬曆二年二月 日

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金貴榮 誌

 

번역문

조선국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동지 경연춘추관사 핸 통정대부 승원원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강공묘지

판윤(判尹) 강군(姜君)이 그의조부(大父) 초당공(草堂公)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시를 선군(先君)께서 초당공의 비석(碑石)을 새겨 세움으로써 묘도(유)를 표(表)하려 하였다가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別世)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형제(兄弟)들이 선고(先考)의 뜻을 이루고자 하니 당신께서 비문을 지어 주소서 하였다.

아! 나는 말을 잘하는 자가 못된다. 그러니 무었으로써 초당공의 밝은 덕(德)과 탁월(卓越)한 행실(行實)을 後世의 사람들에게 전하여 믿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나는 외람되게 붓을 잡는 職責을 맡은 몸이기에 무어라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사 그 行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초당공의 諱는 景敍요,字는 子文이요,號는 草堂이니 晉州의 大姓 姜氏이다.公의 증조부(曾祖父)의 휘는 元佑이니 벼슬이 牧使에 이른 분이요,祖父의 휘는 中善이니 일찍이 文化縣令으로 있을 적에 왜구(倭寇)가 침범(侵犯)하거늘 긍이 이를 쳐서 물리쳤기에 그 공(功)으로 곡산군사(谷山郡事)로 승진(昇進)하신 분이며, 考 諱는 舜民이니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으로서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증직(贈職) 받은 분이시고 비(妣)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서 고려시중(高麗侍中) 윤석(尹碩)의 후손(後孫)이요, 판관(判官) 윤인경(尹仁卿)의 따님이시다.

초당공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25년 癸亥(明 英宗 正統 8년 서기1443년)에 탄생하셨고 성종(成宗) 3년 壬辰(서기1472년)에 사마시(司馬試)의 양과(兩科:생원과 지사과를 뽑는 소과)에 합격하였으며, 성종(成宗)8년 丁酉(1477년)에 文科에 등제(登第)한 뒤에 뽑혀서 승문원권지(承文院權智)에 보하였다가 옮겨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누차(屢次) 옮겨서 군기사주부(軍器寺主簿)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에 충임(充任)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는어버이를 봉양(奉養)하기위하여 은률현감(殷栗縣監)으로 나갔었다가 얼마 안되어 임금(王)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任命)된 뒤에 누차 옮겨 병조좌랑(兵曹佐郞)과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와 이조정랑(吏曹正郞)과 봉상사첨정(奉常寺僉正)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과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과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과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과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의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하였다.

연산군(燕山君) 3년 丁巳(1497년)에 중시(重試)에 합격되었으며, 승진(昇進)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있다가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옮기고는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수찬(修撰)하는데 참여(參與)하였다. 연산군4년 戊午(1498년)에 사화(史禍)에 연계되어 회령(會寧)으로 귀양갔다가 연산군 7년 辛酉(1501년)에 귀양에서 풀려나와 해주(海州)의 촌 집에 숨어 살면서 그곳에서 여생(餘生)을 마칠 것 같이 하였었다. 연산군 12년 丙寅(1506년)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되고서 나라에서 공을 불러서 사도사정(司導寺正)을 임명하였고 연산실록(燕山實錄)을 수찬(修撰)하는데 참여하게 하였다.

중종 2년 丁卯(1507년)에 정시(廷試)에 수석(首席)으로 합격되고서는 승진(昇進)하여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옮겼으며 다시 사간원의 장(長)에 임명되었다. 중종4년 己巳(1509년)에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로 재임(在任) 하던중 중종5년 庚午(1510년) 1월11일에 병(病)으로 자택(自宅)에서 별세(別世)하셨으니 향년(享年) 68세 이시다.

초당공은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하여서 말과 웃음이 적으셨고 남을 인허(認許)하여 주는 것이 적었으며, 오직 독서(讀書)하기를 좋아하셔서 손에는 항상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때묻은 옷을 입고 비새는 집에 살으셨으나 늘 태연하시였다. 일찌기 한휴전(韓休傳)을 읽다가 “명황(明皇)의 얼굴이 파리하는데 천하(天下)가 살찐다”는 말에 이르러서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셨다. 항상 말하기를 “선비가 한 세상(世上)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에게 행(行)하기는 바름으로써 하고 조정(朝政)에 서는 곧은 도리(道理)로서 할 뿐이니 뜻을 굽히면서 구차스럽게 진취(進就)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겠다”하셨다. 평생에 일찍이 명함(刺)을 가지고 다니면서 남에게 주지 아니하였지마는 그러나 한때 이름을 알만한 선비들이 날마다 공의 집에 모이며는 문득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예(禮)와 이제를 상확(商確)하셨다. 또 학도(學徒)들을 가르치기에 성의(誠意)를 다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종(成宗)께서 공의 사람됨을 알으셨기에 권우(眷遇)함이 날로 깊으셨다. 중종(中宗)을 섬기기에 이르러서는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늦게 성스러운 임금을 만났으니 작은 충성(忠誠)이나마 다 바치고자 하지마는 단심(丹心)을 다 펴지 못하였는데 몸이 이미 늙었다 하고는 차탄(嗟歎)하기를 오래하다가 병이 더하여서는 左右의 사람에게 명하여 붙들어 일으키게 하고는 정좌(正坐)를 하고 영서(永逝)하였으니 사림(士林)에서 슬퍼 애석해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임금께서 “공의 집이 너무 빈궁(貧窮)하여서 장례(葬禮)를 치루지 못한다”함을 듣고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관곽(棺槨) 등 장례(葬禮)에 필요한 것들을 보내 주어서 교하(交河) 치소(治所)의 남쪽 소이산(所伊山) 신좌을향(辛坐乙向)의 언덕에 부인(婦人)과 나란히 장사(葬事)하였다.

부인 박씨(朴氏)는 판원(判院)박순(朴淳)의 후손으로 평사(評事) 박숙창(朴叔暢)의 따님이시다. 나면서부터 정숙(貞淑)하고 예의(禮儀)발랐다. 항상 열려도를 보고서는 늘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았으며 집안 다스리기를 법도있게 하여서 은혜와 예절이 갖춰 지극하니 집안(閨門)이 엄숙하며 질서가 있었기에 공이 항상 부인을 공경하기를 마치 큰 손님맞듯 하였다. 일찍이 하인이 계란을 가지고 와서 공의 아들에게 주었더니, 부인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남편이 평생동안 남의 주는 것을 받은적이 앖었다.어찌 아들 때문에 그의 청덕을 누되게 하겠는가”하고 즉시 돌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한다.

초당공이 먼 곳으로 귀양가게 될 적에 부인은 “공의 죄가 아닌데도 그렇게 됨”을 원통해 여기어서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음식을 전폐하였기에 드디어 깊은 병이 되어 위경에 이르러서는 개연히 탄식하기를“나의 병이 거의 일어날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는 건질을 받들어서 낭군을 섬기지 못합니다”하고 편지를 써서 영결을 고하고는 피를 토하고 영서하셨으니 향전 36세였다. 중종이 즉위한 처음에 교명을 내리어 정문하였다.

공의 저술한 유고가 상당히 있었으나 거의 다 방실되었고 다만 초당시집한 권이 세상에 전하여지고 있다. 공은 한 아들과 한 여식이 있으니 아들의 이름은 공망이다.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그이 아들이 존귀하였기 때문에 판서를 증직받았다.

판서공 공망은 봉사 최장손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낳았으니 맏아들은 민이니 일찍 죽었고, 둘째는 욱이니 도승지이고, 셋째는 호지 충순위이고, 넷째는 섬이니 판윤이요, 다섯째는 성이니 현령이다. 맏딸은 종실 구산령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봉사 윤상원에게 시집갔다.

감찰 성희문도 다섯아들과 두딸을 낳았으니 맏아들 세헌은 만호이고, 둘째아들 세장은 호조판서이고, 셋째아들 세범은 일찍 죽었고, 넷째아들 세칙은 북도 우후이고, 다섯째아들 세준은 참봉이다.맏딸은 충의위 이세분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동지중추부사 오성에게 시집갔다.

도승지 욱에게 한아들과 두딸이 있으니 맏딸은 홍문관교리 조정기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정억령에게 시집갔다. 충순위 호에게 두 딸이 있으니, 맏딸은 안윤국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이지길에게 시집갔다. 판윤 섬에게 한 아들과 한 딸이 있으니 아들 의호는 권지 성균관학유이고, 딸은 찰방 유영성에게 시집 갔다.현령 성에게 두 딸이 있으니 맏딸은 이광륜에게 시집 갔고, 둘째 딸은 어리다.

구산령에게 세 아들과 세 딸이 있으니 맏아들 이경은 진사이고, 둘째아들은 복경이요, 셋째아들은 유경이다. 맏딸은 선전관 이효종에게 시집갔고, 둘째달은 허인필에게 시집갔고, 셋째딸은 최인립에게 시집갔다. 봉사 윤상원에게 두딸이 있으니 맏딸은 최광규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남이게에게 시집갔다. 만호 성세헌에게 한아들과 한 딸이 있으니 아들 성두는 직장이요, 딸은 부사 김세공에게 시집갔다. 판서 성세장에게 한 아들과 다섯딸이 있으니, 아들은 성윤이고 맏딸은 직장 민수도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윤영에게 시집갔고, 셋째딸은 현감 한순에게 시집갔고, 넷째딸은 종실 구성정에게 시집갔거, 다섯째 달은 생원 박동로에게 시집갔다. 우후 성세칙에게 한딸이 있으니 새원 홍의필에게 시집갔다. 참봉 성세준에게 한 딸이 있으니 이응에게 시집갔다. 충의위 이세분에게 세 아들과 세 딸이 있으니 맏아들은 질이요, 둘째아들은 확이요, 셋째아들은 애이고, 맏딸은 한심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현감 김굉에게 시집갔고, 셋째달은 김간에게 시집갔다.

동지중추부사 오성에게 한아들과 세딸이 있으니, 아들은 응기이고 맏딸은 직장 조흔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생원 조대직에게 시집갔고 셋째딸은 김경복(김경복)시집갔다. 그 밖에도 내외의 현손들로서 남자나 여자로 아직 어린 자손이 80여 인이나 된다

명을쓰기로

강씨와 박씨는 세상의 이름있는 대족으로서 한결같이 대등한 집안이기에 이제 두 아름다운이 합하여 결혼 했오 성품은 강직하고 행위는 열렬하였으니덕은 외롭지 아니 하였으나,먹고 입는 것은 이이 그리 박하였오. 죄 안닌데도 귀양갔기에 원퐁함이 망극하였오 한분은 죽어서 돌아오지 않고,한분은 늙음이 이르렀오. 오래되면 이루어짐은 하늘이 기필할 것이니 후손들ㅇ에게 복을주어 길이 발양하여서 치성하여 번창하고 어질고 또 통달하여서 무궁토록 보전하는 것은 이 비석을 보고아소.

자헌대부이조판서겸 지경연의금부 성균관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 김귀영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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